경의선 숲길을 따라 밤 산책을 하다 신수동 쪽으로 접어들면 소나무 사이로 파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 건물 1층 모퉁이에 자리 잡은 빠리바게뜨다. 숲길 가로등은 노랗게 번지고, 빵집 유리창 너머는 주황빛으로 따뜻하다. 어둑한 공원에서 바라보면 그 모퉁이만 유난히 환하다.

이 자리가 처음부터 빠리바게뜨였던 건 아니다. 오래전 이곳은 빵굼터였다. 이름부터 푸근하던 그 빵집이 어느 날 프랜차이즈 간판을 달았다. 간판 색도 빵 진열 방식도 바뀌었지만, 이 모퉁이에 빵집이 있다는 사실만은 그대로다. 동네 사람들한테 이곳은 지금도 “그 빵집 자리"다.
하숙집 골목 입구를 지키는 가게
빵집 뒤로 들어가면 하숙집과 자취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서강대 정문에서 멀지 않아 신수동은 오래전부터 학생들 방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3, 4층짜리 다세대 건물마다 창문이 촘촘하게 나 있고, 밤이 되면 그 창들에 불이 하나둘 켜진다.
그러니 이 빵집을 드나드는 손님도 대부분 서강대생이다. 아침 수업 전에 빵 하나 집어 가는 학생, 밤늦게 과제하다 출출해서 슬리퍼 차림으로 내려온 학생, 하숙집 밥이 질려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는 학생까지. 자취하는 사람에게 집 앞 빵집은 반찬가게이자 야식집이고 가끔은 작은 사치이기도 하다. 바로 옆 GS25 앞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의자도 그런 동네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숲길이 생기고 손님이 달라졌다
예전엔 학생들만 오가던 길이었는데, 경의선 숲길이 생긴 뒤로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산책하는 동네 주민, 강아지와 함께 걷는 사람, 연남동 쪽에서 쭉 걸어 내려온 사람들이 숲길을 빠져나오다 이 빵집에 들른다. 숲길과 자취촌 골목이 맞닿는 자리에 있다 보니 양쪽 손님을 다 받게 된 셈이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 보면 건물이 생각보다 정겹다. 붉은 벽돌 3층 건물 위층에는 베란다 난간이 달린 집이 있고, 창문 몇 곳에는 불이 켜져 있다. 1층은 빵집, 위층은 누군가의 방이다. 이 동네다운 구조다. 옆 흰 건물 1층에도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건너편 건물에는 필라테스 오픈 이벤트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학생들만 살던 골목에 조금씩 다른 가게가 섞여 들어오는 게 보인다.
간판은 바뀌어도 자리는 남는다
빵굼터가 빠리바게뜨로 바뀌었을 때 아쉬워한 사람도 꽤 있었을 거다. 동네 빵집 이름이 사라지는 건 어쩐지 서운한 일이니까. 그래도 밤 산책길에 이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비슷하다. 빵집이 여기 계속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
학생들은 해마다 들어왔다 졸업하며 떠나고, 하숙집 주인도 바뀌고, 숲길이 생기면서 동네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그 사이에도 이 모퉁이에서는 매일 빵이 구워지고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신수동에서 한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간판 이름이 무엇이든 이 불빛만 보고도 여기가 어딘지 알아볼 거다.
